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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살아가기/하루키와 고전을 좋아해

어린왕자, 언제나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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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린왕자를 처음 다 읽은 건  호주에서 공부를 하던 때였다. 

18살 마냥 놀고만 싶던 나이 늘 몰래 나가 놀 궁리만 했다. 어딜 가야 뭘 맛있게 먹고 놀지가 항상 나의 최대 관심사이자 고민이었다. 나를 데리고 있던 가디언은 그런 내게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될거라는 엄명, 그리고 실제로 나를 방 안에 가둬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신고감인데... 

그리고 그 때 내게 주어진 숙제가 어린왕자였다. 영어로 된 어린왕자를  한국어로 모두 번역해서 가져오지 않으면 내일 학교도 못갈 줄 알라는 얘기였다. 함께 갇혀버린 남자 동생은 노인과 바다에 당첨되었다. 다른 방을 쓰던 나이트 죽순이 언니는 놀랍게도 갈매기의 꿈을 받았다. 도대체 내가 이곳에 무엇을 하러 온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지만, 방으로 들어오는 도시락을 먹으며 되도 않는 영어로 어린왕자를 번역해야만 했다. 토플 단어며 에세이며 모두 다 집어 치우고 어린왕자나 번역하라는 말에 차라리 잘 됐나 싶기도 했지만, 아시다시피 그 나이 때 어린왕자는 아무런 흥미도 줄 수 없던 책이어서 그저 고역이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오빠와 나이차이가 많이 난다. 그래서 어렸을 때 항상 혼자 놀곤 했다. 그 놀이의 한 부분이 독서였는데, 엄마는 오빠에겐 책을 많이 사줬지만 내게는 딱히 책을 사주지 않아 오빠의 책을 꺼내보곤 했다. 읽고 또 읽고 신물이 나면 그제서야 아빠 책꽂이를 구경하고 표지가 재밌어 보이는 책들을 꺼내보곤 했었는데, 그 중에는 어린왕자도 있었다. 

그 때 나는 7살이었다. 60권짜리 위인전을 정확히 5번 완주를 하고 난 뒤였다. 이젠 정말 재미가 없었다. 어떤 책을 봐야 재밌을까 하품을 하며 뒤지던 때, 어린왕자를 찾았다. 표지의 어린왕자는 지금 생각해도 알록달록 너무 재밌어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제목도 왕자다. 공주를 좋아할 나이, 왕자라는 책의 제목은 사막 한 가운데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한 기분을 주었다. 하지만 그건 신기루였다는 걸 10페이지도 채 안 돼서 알 수 있었다.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노잼이었다.

그렇게 안 좋은 추억을 가진 어린왕자를 번역하고자 했으니 고역도 그런 고역이 없었다. 이해가 돼야 번역을 할텐데 도대체 이런 말을 왜 하는지 이런 멍청이 같은 책을 쓰고도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니, 비행기나 운전하지 이런 책은 왜썼나 하는 생각으로 개발새발 번역을 하고 도망갔던 기억만 남았다. 그야말로 거지같은 책이었다. 

그러다 어린왕자를 다시 잡게 된건 대학교 3학년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고민도 많고 방황도 많이 하던 시절 공부는 안하고 야구만 쫓아다니던 때 중간고사 공부를 하려니 될리가 없지 아는게 없어서 멍때리고 있을 때,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또 도서관으로 갔다. 나는 스페인어를 전공해서 여러 문학수업을 많이 듣곤 했는데, 남들이 다 본 책들을 하나도 보지 않은 것에 대해 창피함과 민망함을 가지곤 했었다. 어떤 수업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아마 스페인 역사가 아니었을까), 헤밍웨이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 그 바보같은 기억을 안고있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연쇄적으로 어린왕자를 떠올리게 됐다. 생각해보니 어린왕자도 저렇게 번역만 했지 책을 읽었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갈매기의 꿈, 노인과 바다, 어린왕자 이 세 책 모두 초등학교 때 섭렵하고 올라오는 목록들 아닌가 하는 생각에 책이 짧기도 짧고 기분전환이나 하자 하고 어린왕자를 필두로 읽기 시작했다. 

결론은 보다시피 그렇다. 감동도 그런 감동이 없었다.

생텍쥐베리는 책을 시작하기 전, 헌사의 시작에 이렇게 써 두었다. "내가 이 책을 어른에게 바친 것에 대해 어린이들에게 용서를 빈다."

 도서관에서 책을 다 읽은 뒤 서점으로 가서 바로 책을 샀다. 읽고 또 읽었다. 신기한 점은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소중한 책으로 남았고 항상 보이는 곳에 꽂아두고 위안을 삼았다.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면 반드시 표시해놓고 써보고 곱씹고 생각해보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또 놀라운 것은 읽을 때마다 마음에 와 닿는 별들이 항상 달라진다는 점이다. 

생텍쥐베리는 생각이 많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혼자 비행을 하며 생각할 시간이 많았겠지. 혼자서 생각하고 번뇌하고 또 그 생각들이 커지고 커져서 형상화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 산물이 어린왕자였던 것 같다. 그에게서 볼 수 있는 그의 모습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책이다. 한없이 순수하고 맑다. 어른이지만 아이같은 마음으로 살고싶던 사람, 그래서 하늘을 동경하고 비행이 즐거웠던 사람. 어쩌면 그가 생각하는 이상과 세상이 너무 달라 항상 아무 것도 없는 공활한 하늘을 날고 싶었던건지도 모르겠다. 

독서는 내게 삶이 힘들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지표이고, 재밌는 책과 좋아하는 책을 찾는 빈도수가 높아지는 것은 나의 힘듦과 비례한다는 이야기기도 했다. 어린왕자는 역시 힘들 때 많이 읽던 책이었는데, 예전에 어떤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가장 아끼는 하드커버 어린왕자를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다 표시해 놓은 그 책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한 채로 만나지 못해서 책이 없다는 것을 요 근래에 깨달아 버렸다. 힘들 때마다 표시해 둔 부분을 자주 읽곤 했었는데... 아쉬운 마음에 또 서점으로 갔다. 


20.

순간, 어린왕자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꼈다.
어린왕자의 꽃이 말하길 자신 같은 꽃은 세상에 오직 하나뿐이라고 말했는데, 이 정원에는 비슷한 꽃이 5천송이나 피어있지 않은가. 
어린왕자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만약 내 꽃이 이것을 본다면 무척 상심할거야.
내게 놀림 당하기 싫어서 기침을 심하게 해대고, 어쩌면 죽는 시늉을 할지도 몰라.
그러면 난 꽃을 보살피는 척을 해야겠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꽃은 내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고 정말 죽어버릴 지도 몰라."

어린왕자는 생각했다.

'이제까지 나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꽃을 가지고 있어서 부자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꽃이 그저 평범한 장미 한송이였다니..
겨우 내 무릎 높이의 화산 세 개, 그것도 한 개는 불을 뿜지 않는 휴화산이라니. 이것 만으로는 내가 위대한 왕자라고 할 수 없어.."

어린왕자는 풀 숲에 엎드려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21.

"비밀 하나를 알려줄게. 아주 간단한 건데, 마음으로 봐야 잘 보인다는 거야.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거든.
그럼 안녕, 잘 가."

어린 왕자는 여우의 말을 잊지 않기 위해 되풀이 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네 장미가 너에게 그토록 중요한 것은 네가 장미에게 들인 시간 때문이야."
이번에도 어린왕자는 여우의 말을 잊지 않으려고 따라했다.
"내가 장미에게 들인 시간때문이야."

"사람들은 이 진리를 잃어버렸어. 하지만 너는 잊어서는 안 돼. 네가 길들인 것에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으니까.
너의 장미는 네가 책임져야 해."
"나는 내 장미를 책임져야 해."

어린왕자는 여우의 말을 반복하며 웅얼거렸다.

26.

어린왕자는 내 물음에 답하지 않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요."
"그래."
"꽃도 마찬가지예요. 아저씨가 어느 별에 있는 꽃 한 송이를 사랑하게 된다면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어느 별에나 꽃은 필 테니까요.
"그래."

"물도 마찬가지예요. 아저씨가 마시라고 준 물은 음악 소리 같았어요. 도르래와 밧줄 때문에요. 생각나죠? 물이 아주 달콤했잖아요."
"그래."

"밤마다 별을 바라보세요. 내 별은 너무 작아서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줄 수도 없어요. 하지만 그게 더 좋을 거예요. 그래야 아저씨가 어떤 별을 바라보든 즐거울 테니까요. 밤 하늘의 모든 별이 아저씨의 친구가 될 거예요. 이제 아저씨에게 선물을 하나 줄게요."

이렇게 말하고 어린왕자가 웃었다.

"아! 그래. 난 네 웃음 소리가 좋아."
"내가 주려던 선물이 바로 그거예요. 물과 같은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이지?"

"사람들은 누구나 별을 바라보지만, 모두에게 같은 의미는 아니에요. 어떤 사람에게는 작은 빛일 뿐이지만 여행객에는 길잡이가 돼 주잖아요. 학자에게는 연구대상이고 장사꾼에게는 별이 황금과도 같은 것이었어요. 

하지만 별은 말이 없어요. 아저씨는 누구도 갖지 못한  별을 갖게 될 거예요."

"그건 또 무슨 말이니?"
"아저씨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볼 때 그 별 중 하나에 내가  살고 있을 테니 말이에요. 또 내가 그 별 중 하나에서 웃고 있을테니 아저씨는 모든 별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일거예요. 그러면 아저씨는 미소짓는 별을 갖게 되는 거잖아요."

어린왕자가 또 웃었다.

"시간이 지나면 슬픔은 무뎌지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아저씨도 언젠가 슬픔이 지나가면 나를 알게된 것이 기쁨이 되겠지요. 아저씨는 언제까지나 내 친구로 남을 거고, 나와 함께 웃고싶어질 거예요. 그래서 가끔 괜스레 창문을 열게 되겠지요. 아저씨가 밤하늘을 보고 웃음 짓는 모습을 보고 친구들이 놀라면 '저 별들은 항상 나를 웃음짓게 해' 하고 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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